밤 도시 불빛이 비치는 방, 침대에 엎드려 보라색 휴대폰을 든 긴 보랏빛 머리의 여성이 뒤에서 턱을 괴고 웃는 남성을 돌아보며 웃고 있고, 방 한쪽에 여행 가방과 옷이 놓여 있다. 왼쪽 위에 '사주 오행에 불 하나 없는 동생의 병오년 연애'라는 손글씨 제목이 있다.
연애·결혼·재회

사주 오행에 불 하나 없는 동생의 병오년 연애

사주 오행표에 불이 0개로 나온 걸 보고 "난 원래 연애 체질이 아니야"라며 서른셋까지 연애를 미뤄 둔 동생이, 불 두 글자가 한꺼번에 들어온 올해 처음으로 한 남자한테 주말을 전부 내줬어요. 오행 하나가 비어 있다는 말이 실제로 무슨 뜻인지 동생 명식으로 따라가 봤어요.
글쓴이 문해진 · 권이헌
지원이가 일산에서 돌아온 건 8월 마지막 일요일 밤 열한 시가 넘어서였는데, 현관에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제 방으로 와서 침대 끝에 걸터앉더라고요. 7월부터 주말마다 그 남자 집에 가 있었으니 그날이 일곱 번째 주말이었어요. 지원이는 한참 자기 손톱만 들여다보다가 "언니, 나 지금 정상 아닌 것 같아"라고 했어요. 동생이 연애 얘기를 먼저 꺼낸 건 처음이라 저는 대답보다 놀라는 게 먼저였죠.
놀랄 만도 했던 게, 지원이는 스물다섯부터 서른둘까지 두 번 사귀면서 두 번 다 "귀찮다"는 말로 끝낸 애거든요. 저는 사람들이 잠자리와 스킨십에서 어디서부터 식는지를 오래 들어 온 사람인데, 지원이는 그런 얘기가 나올 때마다 남의 일처럼 웃었어요. 데이트 비용은 정확히 반으로 나누고, 같이 자도 침대 끝에 붙어서 자고, 헤어질 때도 울지 않았어요. 그리고 지원이한테는 그 모든 걸 한 번에 설명해 주는 캡처가 한 장 있었어요.
2019년에 무료 만세력 앱에서 찍어 둔 오행표였는데, 나무 둘, 불 0, 흙 둘, 쇠 셋, 물 하나가 막대로 그려져 있고 불 칸만 텅 비어 있었어요. 그 밑에는 "관성 없음, 남자 인연이 약한 편"이라는 한 줄이 붙어 있었고요. 지원이는 6년 동안 연애 얘기만 나오면 이 캡처를 꺼냈고, 솔직히 저도 반쯤은 믿었어요. 불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니 누구한테 뜨거워질 일도 없겠거니 했던 거죠. 그런데 그날 밤 침대 끝에 앉은 지원이를 보고 나니, 그 캡처가 뭘 빠뜨렸는지 제대로 봐야겠다 싶었어요.

불 0개라는 오행표의 빈칸

그래서 지원이 생년월일시를 다시 넣어 봤어요. 1993년 7월 9일 아침에 태어난 지원이 명식은 계유년, 기미월, 신묘일, 신묘시예요. 사주 오행은 이 여덟 글자를 나무·불·흙·쇠·물 다섯 가지로 나눠 본 건데, 흔히는 앱이 보여 주는 막대그래프처럼 개수로 세고 0인 칸을 그 사람에게 없는 것으로 읽어요. 겉으로 보이는 여덟 글자만 세면 지원이에게 불은 정말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아래 줄 글자인 지지는 한 글자 안에 다른 기운을 품고 있어서, 개수만 세면 그 속이 빠져요. 지원이가 태어난 달의 글자는 양을 뜻하는 미인데, 미는 소서부터 입추 전까지, 한여름 끝자락의 달이에요. 그 미 안에 정화라는 작은 불이 들어 있어요. 사주픽 엔진이 숨은 글자까지 무게를 달아 다시 셌더니 지원이 오행에서 불은 0이 아닌 4퍼센트로 나왔어요. 양은 작아도 태어난 달 자리에 박혀 있는 불이었던 거죠.
이 불이 지원이에게 무엇인지가 중요해요. 지원이는 신금 날에 태어났는데, 신금은 다듬어 놓은 쇠붙이나 보석 같은 쇠예요. 쇠를 녹이고 모양을 바꾸는 게 불이라서, 신금에게 불은 관성, 곧 나를 누르고 다잡는 힘이 돼요. 여자 사주에서는 이 관성을 남자 인연으로도 읽으니, 그 앱이 남자 인연이 약하다고 한 것도 여기서 나온 말이었어요. 반대로 쇠는 지원이 사주에서 36퍼센트로 가장 많고, 엔진도 일간의 힘이 센 신강으로 봐요. 자기 힘은 넘치는데 그 힘을 눌러 줄 쪽은 달 자리 안에 숨어만 있는 사주인 거예요.
명식을 이렇게 놓고 보니 제 생각이 바뀌었어요. 지원이가 연애를 귀찮아한 건 남자 인연이 없어서 생긴 일이 아니었어요. 자기보다 센 힘에 한 번도 눌려 본 적이 없으니, 지금까지 만난 사람은 전부 지원이가 반을 나눠 내고 지원이가 끝낼 수 있는 상대였던 거죠. 그런 사람 앞에서 뜨거워질 이유가 없었던 거고요.

불 두 글자가 한꺼번에 든 해

올해가 달랐던 이유는 해 자체에 있었어요. 2026년은 병오년인데, 병은 큰 불이고 오는 말을 뜻하는 한여름의 불이에요. 위아래 두 글자가 다 불인 해가 불 칸이 비어 있던 사주에 들어온 거예요. 신금인 지원이에게 병은 정관, 오는 편관이라 둘 다 관성이고, 지원이가 그 남자를 소개로 만난 게 3월이었으니 병오년이 시작되는 입춘이 지나고 한 달 만이었어요.
없던 오행이 운에서 들어오면 원래 많던 오행이 들어올 때보다 훨씬 크게 와닿아요. 늘 갖고 있던 건 다루는 법을 알지만, 처음 들어오는 건 어떻게 받아야 할지 몰라서 그대로 휩쓸리거든요. 지원이가 정상이 아닌 것 같다고 한 게 바로 그 얘기였어요. 금요일마다 퇴근하자마자 일산행 버스를 타고, 그 남자가 고른 식당에 가고, 그 남자 일정에 맞춰 자기 요가 수업까지 옮기는 건 지원이로서는 처음 해 보는 일이었으니까요. 잠자리 얘기도 물어봤더니 지원이는 처음으로 얼굴이 빨개져서 "그건 안 귀찮아"라고만 했는데, 저한테는 그 한마디로 충분했어요.
그래서 그날 밤 지원이한테 이렇게 말했어요. "너 연애 체질 맞아. 지금까지는 네가 다 정할 수 있는 사람만 만났던 거야." 그리고 하나를 더 말해 줬어요. 십 년마다 바뀌는 지원이의 대운에는 예순아홉 살까지 불이 한 번도 들어오지 않아요. 내년은 정미년이라 정이 또 작은 불이고 미 안에도 불이 들어 있어서 이 흐름이 한 해 더 이어지지만, 그다음부터 불은 다시 달 자리 안으로 숨어요. 그 남자가 좋은 사람인지는 사주가 알려 주지 않아요. 다만 지원이가 누군가에게 마음과 몸을 이만큼 내주는 시기가 이번 두 해라는 건 명식에 그대로 있으니까, 결혼을 생각한다면 이 두 해 안에 정하라고 저는 돌려 말하지 않고 얘기했어요.
지원이는 한참 듣고 있다가 휴대폰을 꺼내 그 캡처를 열었어요. 지우려나 했는데 불 칸 위에 손가락을 올려놓고는 "여기다 4라고 써 놓을까" 하면서 웃더라고요. 그러고는 다음 주 금요일 일산행 버스 시간을 알람으로 맞춰 놓고 제 방을 나갔어요.
사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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