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 진 사무실 창가 책상에서 안경 쓴 금발의 서지안이 펜을 입가에 대고 서류를 들여다보고, 오른쪽에서 정장 차림 상사의 손이 책상 위로 다가온다.
직장·이직·돈

괴강살이라 1년마다 쓴 사표 세 장

괴강살이 있으면 윗사람과 부딪혀 한 직장에 오래 못 붙어 있는다는 말을 믿고, 연주는 이번에야말로 참아 보겠다며 정규직 전환 제안서에 서명하려던 참이었어요. 그 제안서와 연주의 명식을 나란히 놓고 보니, 연주가 참아야 할 건 성격이 아니라 제안서 둘째 줄이더라고요.
글쓴이 서지안
연주가 보낸 제안서 파일을 열었을 때 저는 연봉 칸보다 보고 체계 칸을 먼저 봤어요. 이직하는 사람들 계약서를 오래 봐 오다 보니, 돈은 협상하면 몇백만 원씩 오르내리지만 누구한테 무엇을 보고하느냐는 한 번 서명하면 다음 이직 때까지 안 바뀐다는 걸 알거든요. 연봉은 5,800만 원으로 지금 받는 프리랜서 단가보다 조금 낮았는데, 그 아래 줄에 "디자인 결과물은 상무 직속 주간 보고 후 확정"이라고 적혀 있었죠. 연주는 이 회사의 결제 화면 개편을 혼자 맡아 1년째 하고 있는 디자이너였고, 회사는 그 일을 정규직으로 묶어 두고 싶어 했어요. 그래서 전화로 물었어요. 이 줄에 적힌 일을 지금은 어떻게 하고 있냐고요.
지금은 팀 리드랑 둘이서 정하고 바로 개발로 넘긴다고 했어요. 그런데 연주는 그 얘기보다 다른 얘기를 더 하고 싶어 했어요. 스물여섯부터 다닌 회사 세 곳을 전부 1년 남짓 만에 그만뒀는데, 엄마가 예전에 받아 온 사주 풀이에 괴강살이 있어서 윗사람과 부딪히고 직장을 오래 못 다닌다고 적혀 있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번엔 그냥 참으려고요. 정규직 되면 적어도 1년마다 짐 싸는 건 끝나잖아요." 저는 그 말을 듣고, 사표 세 장을 쓰기 전에 회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부터 하나씩 물었어요.

결재 칸이 늘어난 다음 달의 사표

연주의 대답은 세 번 다 비슷했어요. 첫 회사에서는 새로 온 본부장이 시안마다 결재 단계를 두 칸 더 붙였고, 두 번째 회사에서는 대표가 디자인 회의에 매주 들어오기 시작했고, 세 번째 회사에서는 실장이 바뀌면서 연주가 정하던 색과 글꼴을 실장이 고르게 됐대요. 일이 많아서 나온 적은 한 번도 없었고 사람이 싫어서 나온 것도 아니었는데, 연주가 혼자 정하던 일 위에 누군가 한 칸 올라앉은 다음 달마다 사표가 나왔던 거죠. 이 얘기를 듣고 나니 괴강살이 정말 어떤 표시인지부터 제대로 짚어 봐야겠더라고요.
괴강은 태어난 날의 두 글자인 일주가 경진, 임진, 무술, 경술 넷 중 하나일 때 붙는 이름이에요. 흔히는 기가 세고 고집이 세서 사람과 부딪힌다, 팔자가 세다는 말로 알려져 있죠. 그런데 이 이름을 정리해 둔 명나라 책 삼명통회를 펴 보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요. 그 책은 괴강을 일 앞에서 결단이 빠르고 권한을 쥐려는 성질로 적고, 사주가 튼튼하면 남다르게 귀해지고 약하면 뼈까지 가난해진다고 해요. 세다는 것 자체보다 그 힘을 받칠 몸이 있느냐를 먼저 보라는 얘기인데, 같은 대목에 경술과 경진 두 날은 관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꺼린다는 줄이 하나 더 붙어 있어요.
관은 사주에서 나를 누르고 다스리는 글자예요. 회사로 옮겨 오면 상사, 결재 라인, 내 일 위에 서는 사람이 여기에 해당하죠. 연주의 명식을 엔진으로 뽑아 보니 임신년 신해월 경술일 계미시였는데, 태어난 날이 경술이라 괴강이 맞고, 힘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중화로 나와서 약한 쪽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눈에 보이는 여덟 글자 안에는 관이 하나도 없었어요. 연주에게 관이 되는 불 기운은 연주가 앉은 날의 땅 글자인 술 속에, 그리고 태어난 시의 미 속에 조금씩 숨어 있을 뿐이었죠. 삼명통회가 경금은 술 속의 불을 관의 창고로 쓴다고 적은 게 바로 이 모양이라, 연주는 자기를 다스리는 글자를 자기 자리 안에 품고 태어난 사람이에요. 스스로 기준을 세우고 그 기준을 지킬 때 제일 잘 돌아가는 사람이라는 거죠.

관이 겉으로 뜨는 해의 정규직 전환

여기까지 보고 나니 세 번의 사표가 전혀 다르게 읽혔어요. 연주가 윗사람과 못 지내는 팔자라서 나온 게 아니라, 안에 품고 있던 관 위에 바깥의 관이 하나 더 올라앉을 때마다 버티지 못했던 거예요. 게다가 올해 병오년은 천간에 병화, 지지에 오화가 들어오는 해인데 둘 다 연주에게는 관이에요. 숨어 있던 관이 그해의 운에서 겉으로 떠오르는 해에, 마침 상무 직속 주간 보고라는 줄이 붙은 제안서가 날아온 거죠. 저는 연주한테 돌려 말하지 않았어요. 이 줄에 서명하면 1년도 아니고 반년 만에 네 번째 사표를 쓰게 될 거라고요.
연주는 그럼 정규직을 포기하라는 거냐고 되물었는데, 제 말은 그게 아니었어요. 회사가 원하는 건 결제 화면을 끝까지 책임질 사람이고 연주가 견디지 못하는 건 결과물 위에 서는 한 칸이니까, 그 둘을 떼어서 다시 제안하면 되거든요. 그래서 정규직 전환 대신 결제 화면 개편의 디자인 확정을 연주가 하는 조건으로 1년 계약을 새로 쓰자고 했고, 단가는 지금보다 15% 올려 부르라고 했어요. 상무에게는 매주 시안을 들고 가는 대신 분기마다 결제 완료율 같은 결과 숫자를 보여 주는 걸로 바꾸고요. 사주는 그 상무가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까지 알려 주지 않아요. 다만 연주를 어떤 자리에 앉히면 오래 못 가는지는 꽤 정확하게 말해 주고 있었고, 그 자리가 이번 제안서 둘째 줄에 그대로 적혀 있었던 거예요.
연주는 그날 밤 회신 메일을 썼어요. 연봉 얘기는 빼고 둘째 줄만 고쳐서, 디자인 확정은 담당 디자이너가 하고 결과는 분기마다 상무님께 보고한다고 바꿔 넣었대요. 사흘 뒤 인사팀에서 정규직 전환은 없던 일로 하되 계약 조건은 맞춰 보겠다는 답이 왔고, 단가는 연주가 부른 것보다 조금 낮은 선에서 정리됐어요. 연주는 통화 끝에 엄마한테는 괴강살 때문에 또 정규직을 놓쳤다고 말해 두겠다며 웃었는데, 저는 엄마한테 보여 줄 거면 그 말 말고 단가 올린 계약서를 보여 주라고 했어요.
사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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