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 진 고층 사무실에서 흰 셔츠에 넥타이를 느슨하게 맨 검은 머리 남자가 펜을 입가에 댄 채 서류를 들고 앉아 있고, 책상 앞쪽에 사직서가 놓여 있으며 맞은편 사람이 손을 내밀어 말을 건네는 장면
직장·이직·돈

태어난 시간 모르는 사주에 찍어 넣은 12시 40분

태어난 시간을 몰라서 사주 앱에 아무 시간이나 넣어 본 사람 얘기예요. 저는 그렇게 찍어 넣은 12시 40분 때문에 사표를 쓸 뻔했는데, 시간 칸을 비우고 다시 보니 제 사주에는 돈을 뜻하는 글자가 원래 한 자도 없었어요.
글쓴이 최도훈
제가 태어난 시간에 대해 어머니가 기억하시는 건 "점심 먹고 나서"가 전부예요. 몇 번을 여쭤봐도 대답이 같아서, 스물아홉 살 봄에 처음 사주 앱을 깔았을 때도 시간 칸에 12시 40분을 넣었어요. 점심을 열두 시에 드셨다 치면 그쯤이겠거니 한 거죠. 그렇게 나온 풀이 맨 아래에 "말년에 큰 재물, 남 밑에 오래 있을 사주가 아님"이라는 줄이 있었는데, 하필 그때 저는 3년째 다니던 인사 컨설팅 회사에서 연봉 동결 통보를 받은 직후였어요. 그 한 줄을 읽은 날 밤에 사직서 파일을 만들어 바탕화면에 저장해 뒀어요.
그 뒤로 두 주 동안 프리랜서로 나가면 받을 단가를 엑셀로 계산하면서 지냈는데, 숫자를 아무리 맞춰 봐도 확신이 서지 않아서 어머니께 한 번 더 전화를 드렸어요. 이번에는 말씀이 조금 달라지더라고요. "점심 먹고 설거지까지 다 하고 나서 배가 아프기 시작했으니까 한 시는 넘었을 거야." 그래서 다른 앱에 1시 50분을 넣어 봤더니 이번에는 "조직 안에서 윗사람의 압박을 견디며 크는 관운"이라는 풀이가 나왔어요. 같은 날 태어난 같은 사람이 한 시간 남짓 차이로 사업가가 됐다가 월급쟁이가 됐다가 한 거죠. 둘 중 하나는 틀렸을 텐데, 어느 쪽인지 알아보려면 시간이 사주에서 정확히 무엇을 바꾸는지부터 알아야 했어요.

시간이 바꾸는 두 글자

사주는 태어난 해, 달, 날, 시를 각각 두 글자씩 적어 만든 여덟 글자예요. 시간을 모르면 사주를 아예 못 본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실제로 비는 건 마지막 두 글자인 시주뿐이에요. 다만 그 두 글자가 나머지 여섯 글자의 균형을 기울일 수 있어서, 아무 시간이나 넣으면 원래 없던 기운이 사주에 생겨 버리기도 해요. 게다가 시는 두 시간 단위로 끊기는데, 한국 시간으로 대략 오전 11시 반부터 오후 1시 반까지가 말의 시간인 오시이고 그 뒤 두 시간이 양의 시간인 미시라서, 어머니의 "점심 먹고 나서"는 처음부터 두 시에 걸쳐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제 사주를 처음부터 다시 뽑아 봤어요. 저는 임신년, 갑진월, 계해일에 태어났어요. 태어난 날의 첫 글자가 나 자신인데, 저는 계수, 그러니까 비나 이슬 같은 작은 물이에요. 사주에서는 내가 이겨서 손에 쥐는 오행을 재물로 보기 때문에 물인 저에게 돈을 뜻하는 글자는 불이에요. 그런데 시간 칸을 비워 두고 여섯 글자만 계산해 보니 불이 하나도 없었어요. 오행 비율로 따지면 화가 0이에요. 12시 40분을 넣었을 때 나온 시주는 무오였는데, 그 오가 불이고 저에게는 편재, 크게 굴리는 돈에 해당하는 글자였어요. 앱이 말한 "말년의 큰 재물"은 제가 임의로 찍어 넣은 12시 40분에서 나온 거였죠. 1시 50분을 넣으면 시주가 기미로 바뀌는데, 이 두 글자는 모두 물을 막아 누르는 흙이라 저에게 편관이 되고, 그래서 "압박을 견디는 관운"이 나온 거고요.
연봉 협상을 하다 보면 근거 없이 먼저 나온 숫자가 끝까지 기준 노릇을 하는 걸 자주 보는데, 저한테는 12시 40분이 딱 그런 숫자였어요. 그 숫자 하나에서 나온 편재 한 글자를 붙들고 두 주 동안 단가표를 짰으니까요.

비워 둔 시주와 남은 여섯 글자

그 뒤로 앱의 시간 칸을 '모름'으로 바꾸고 확실한 여섯 글자만 다시 읽었어요.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태어난 달의 첫 글자인 갑목이었어요. 물인 제가 키워 내는 큰 나무라서 저에게는 상관인데, 상관은 내 안에 있는 걸 말과 기술로 밖에 내놓는 힘이에요. 남이 짠 방식에 토를 달고, 더 나은 방법을 말로 증명하려 드는 성질이죠. 그 바로 아래, 달의 땅 자리에는 진토가 있는데 저에게는 정관, 정해진 조직과 직함을 뜻하는 글자예요. 태어난 달 자리는 보통 사회에 나가 일하는 자리로 읽으니까, 일하는 자리에 말로 값을 증명하는 힘과 조직이 위아래로 붙어 있는 셈이에요.
그렇게 놓고 보니 제 사주가 가리키는 사람은 혼자 자본을 굴리는 사업가보다, 조직 안에서 말로 제 몸값을 받아 내는 사람이었어요. 확실한 여섯 글자 안에 돈 글자가 없다는 것도 같은 방향을 가리켰어요. 돈이 저절로 굴러들어오는 사주가 아니니까, 들어올 돈은 협상으로 받아 내야 한다는 뜻으로 읽었거든요. 물론 진짜 태어난 시간은 사주로 거꾸로 맞힐 수 없고, 시주를 흔히 나이 들어 맺는 결과로 읽는 만큼 제 말년이 어떨지는 지금도 빈칸으로 남아 있어요. 그래도 비어 있는 두 글자를 상상으로 채워서 사표를 쓰는 것보다는, 확실한 여섯 글자로 다음 수를 정하는 쪽이 훨씬 남는 장사였어요.
그래서 사직서 대신 이듬해 연봉 협상에서 제가 먼저 숫자를 불렀어요. 동결 통보를 받은 그 회사였고, 그동안 맡은 고객사 재계약 건을 하나씩 들고 들어가서 제가 받아야 할 금액을 말로 설명했는데, 부른 숫자에서 크게 깎이지 않고 도장을 찍었어요. 지금 남의 연봉 협상을 봐 주는 일을 하게 된 것도 그날 협상 테이블에서 시작된 셈이에요.
지난 추석에도 어머니는 "너는 점심 먹고 나서 나왔지" 하셨는데, 이번에는 몇 시냐고 더 여쭤보지 않았어요. 앱의 시간 칸은 여전히 '모름'에 체크돼 있고, 바탕화면에 있던 사직서 파일은 이름만 바꿔서 다음 협상 메모를 적는 데 쓰고 있어요.
사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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