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성격과 반복
문창귀인 있다고 강의만 결제하면 평생 초안만 쓰다 끝난다
글 잘 쓰는 사주라는 말을 듣고 2년 동안 글쓰기 강의를 세 개 들은 후배가 있어요. 올린 글은 아직 한 편도 없고요.
글쓴이 유선우
그 후배 윤서를 만난 건 일요일 아침 반포 한강공원이었어요. 러닝 크루 모임이 끝나고 다 같이 계단에 앉아 쉬고 있는데, 윤서가 휴대폰을 내밀면서 이것 좀 보라고 하더라고요. 노션 화면이었고, 쓰다 만 글이 예순두 개나 쌓여 있었어요. 하나같이 세 문단쯤에서 멈춘 글이었죠. 윤서는 한숨을 쉬더니, 그런데도 이번 주에 8주짜리 에세이 강의를 또 결제했다고 털어놨어요.
윤서는 스물여덟 살 마케터예요. 달리기는 느려도 모임에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을 만큼 성실한 사람이라, 그런 사람이 왜 글은 끝을 못 내는지 궁금했어요. 그래서 물어봤더니 뜻밖에 사주 얘기가 나왔어요.
"제 사주에 문창귀인이 있대요. 글 쓰는 별이래요. 그러니까 제대로 배우기만 하면 뭔가 될 것 같아서요."
그 말을 듣고 나니 윤서가 왜 강의를 멈추지 못하는지 조금 알 것 같았어요. 타고난 재능이 있다고 믿으니까, 그 재능에 걸맞은 글을 쓸 수 있을 때까지 준비를 끝내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저는 문창귀인이 정말 그런 뜻인지부터 궁금해졌어요.
문창귀인은 배우는 별이 아니라 내놓는 별이에요
문창귀인은 사주에 붙는 좋은 표시 중 하나예요. 태어난 날마다 짝이 되는 글자가 하나씩 정해져 있어서, 내 사주에 그 글자가 들어 있으면 문창귀인이 있다고 말해요. 이름에 글월 문(文) 자가 들어가다 보니 보통은 공부 잘하는 별, 글 잘 쓰는 별로 알려져 있죠. 85년생부터 04년생까지 계산해 보면 열 명 중 세 명꼴로 있으니, 생각보다 흔한 표시이기도 해요.
그런데 명리 책들을 찾아보면 이 별을 조금 다르게 설명하는 경우가 많아요. 문창귀인은 공부를 잘하는 표시라기보다 표현을 잘하는 표시라는 거예요. 말하고 쓰고 싶은 마음이 먼저 있고, 그 마음 때문에 공부도 하게 되는 사람이라는 뜻이죠.
윤서의 사주를 뽑아 보니 이 설명이 딱 들어맞았어요. 윤서는 무토(戊) 날에 태어났는데, 무토에게 짝이 되는 문창 글자는 원숭이(申)예요. 그 원숭이가 윤서가 태어난 날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어요. 게다가 이 자리는 윤서에게 식신이라는 힘에 해당해요. 식신은 내 안에 있는 것을 밖으로 내놓는 힘, 그러니까 말하고 글 쓰고 뭔가를 만들어 남에게 보여 주는 힘이에요. 윤서는 태어난 달에도 식신이 하나 더 있어서, 사주 전체가 배워서 쌓아 두기보다 밖으로 꺼내 놓는 쪽으로 기울어 있었어요.
사실 저도 처음엔 문창귀인을 공부 잘하는 별 정도로만 알고 있어서, 하마터면 윤서에게 공부 체질이라고 말할 뻔했어요. 그런데 명식을 보고 나니 윤서가 왜 글을 끝내지 못했는지가 보였어요. 윤서는 강의를 들을 때마다 쓰고 싶은 마음을 과제로 조금씩 풀어 버리고 있었던 거예요. 과제를 내고 강사에게 칭찬을 들으면 그걸로 마음이 채워지니, 노션에 남은 글을 끝까지 쓸 이유가 사라진 거죠.
같은 별을 가진 형은 다르게 썼어요
이 얘기를 하다 보니 같은 크루의 태민이 형이 떠올랐어요. 서른세 살에 물류회사에 다니는 형인데, 이 형도 문창귀인이 있거든요. 병화(丙) 날에 태어났고, 병화의 문창 글자도 원숭이라서 태어난 달에 그 글자가 들어 있어요.
그런데 태민이 형은 글쓰기를 한 번도 배운 적이 없어요. 대신 매주 일요일 밤마다 크루 단톡방에 러닝 후기를 올려요. 누가 어디서 지쳤는지, 신입이 처음 10킬로를 뛰고 나서 뭐라고 했는지 같은 소소한 얘기들이에요. 맞춤법도 가끔 틀리는데, 사람들은 그 후기를 기다려요. 모아서 보고 싶다는 사람이 생겨서 블로그까지 열었고, 거기 올린 글이 지금은 여든 편이 넘었어요.
재미있는 건 태민이 형 사주에서 원숭이 자리는 식신이 아니라는 점이에요. 표시만 놓고 보면 내놓는 힘은 윤서 쪽이 더 분명한데, 실제로 글을 내놓고 있는 사람은 형이에요. 형은 쓸 게 생기면 그날 밤 바로 올렸고, 윤서는 더 잘 쓸 수 있을 때까지 배우러 갔기 때문이에요.
사주가 윤서에게 알려 주는 건 표현하는 힘을 타고났다는 데까지예요. 그 글이 얼마나 좋을지, 누가 읽어 줄지는 사주에 나오지 않아요. 하지만 표현하는 힘을 타고난 사람이 강의만 듣고 있다면, 그 힘을 거꾸로 쓰고 있는 건 분명해요.
그래서 그날 계단에서 윤서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그 8주짜리 강의, 아직 시작 안 했으면 환불해. 그리고 예순두 개 중에 제일 짧은 거 하나만 올려 봐. 너 지금 대회는 한 번도 안 나가고 훈련만 2년째 하고 있는 거야."
윤서는 웃으면서도 창피하다는 말을 두 번이나 했어요. 세 문단짜리 글을 사람들 앞에 내놓는 건 크루 앞에서 처음 10킬로를 뛰는 것만큼 떨리는 일이니 당연하죠. 그래도 제가 본 문창귀인 있는 사람들은 그 창피함을 한 번만 넘기면 두 번째부터는 훨씬 쉽게 쓰더라고요.
다음 날 밤, 단톡방에 윤서의 링크가 올라왔어요. 제목은 '엄마의 립스틱'이었고, 세 문단에서 멈춰 있던 글에 네 번째 문단이 붙어 있었어요. 태민이 형이 제일 먼저 하트를 누르고 "맞춤법 나보다 잘하네"라고 댓글을 달았죠. 강의 환불은 그다음 날 들어왔대요.
글쓴이
유선우
심리 회복